11세 정인서(鄭麟瑞)

통정대부 국자전적 수찬교리 봉상판관 제진주제독 정공인서 행장
(通政大夫國子典籍修撰校理奉常判官除晋州提督鄭公麟瑞行狀)
부군(府君)의 휘는 인서(麟瑞), 자는 사인(士仁)이다. 부군은 임진란을 만났을 때 나이가 6세였다.
모든 친족이 다 기아와 피란 중에 죽고, 오직 부군의 형제가 안음에서 피란하다가 다행히 고향에 생환하여 개연(漑然)히 선대의 유업을 회복시키는데 뜻을 두었고, 가세가 가난한 중에서도 글 읽기를 좋아하여 문명(文名)이 빛났다.
계묘(1603) 3월 9일에 선산 동당시(東堂試:과거의 별칭)에서 당태종추장이밀론(唐太宗推獎李密論)을 지어 제7위에 오르고, 9월 25일에는 태평관(太平館) 입강(入講)에서 제13위에 합격하였으며, 10월 11일에는 성균관 회시에서 제17위에 오르고, 10월 19일에는 왕이 친임한 전시(殿試)에서 다시 제18위에 올랐다.
이에 한림원에 선발되었다가 국자전적(國子典籍)에 올랐고,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정미(1607)에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제수되고 을묘(1615)에 진주제독(晋州提督)에 제수되었는데, 불행히 병을 얻어 집에 돌아와 신고(呻苦)한지 몇 달 만에 약으로써 치료하지 못하고 이내 실성(失性)하여 말이 괴이하였으므로, 듣는 이가 다 놀라고 애석하게 여겼다.
종질 정업(鄭業)은 본시 간교하고 흉특한 사람이었다. 종숙인 부군과 서로 여러 해 동안 격조했다가 광해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부군을 모해하여 공로를 얻으려는 계략으로 문병을 핑계로 찾아와서 광중(狂中)의 말을 퍼뜨리더니 부군에게『범상부도(犯上不道)』의 죄목을 지적하여 재상 정인홍(鄭仁弘)에게 무고하고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몰래 부탁하여 범죄사건을 만들어 부군을 백령도에 안치하고 큰 아들을 정선(旌善)에 유배시켰다.
그 뒤 얼마 안되어 부군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은 적소(謫所)에 있어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도 갈 수가 없었다.
잠시 백령도 안에 모셨다가 큰아들이 석방되자 비로소 고향으로 운구하여 길일을 가려 장사지내고, 삼가 가정에서의 기문(記聞)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그 전말을 대략 기록한 것이다.

고애자(孤哀子) 후시(厚時)는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