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정지신(鄭趾新)

통정대부 행곡성현감 상주진중영장겸토포사 정공지신 행장
(通政大夫行谷城縣監尙州鎭中營將兼討捕使鄭公 趾新 行狀))
영남에서 문무의 거족을 말할 때, 으레 선산 신포(新浦)의 정씨를 수위(首位)로 꼽는다.
이는 그 윗대에 신당선생(新堂先生) 휘 붕(鵬)이 일찍 홍문관에 뽑혀 경학(經學)과 문장이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중세에 휘 영(韺)이 무과에 올라 감찰로서 남한산에서 어가를 호종하였다가 적의 칼에 상처를 입자 인조가 비단 두루마기를 벗어 싸매 주었는가 하면, 경상도 병사(兵使)와 부총관(副摠管)으로 올려 제수되었다.
그 아들 동망(東望)도 충청 병사로 청명(淸名)과 후덕이 사람들의 이목에 남겨진 때문에 남쪽 지방의 인물평이 그러한 것이다.
그 뒤로 후손 중에 무과 출신이 많고 그 행실을 들춰 보면 곧 학문이었는데 통정대부 곡성현감 상주진중영장겸토포사 정공 휘 지신(鄭公 휘 趾新) 자 군우(君又)도 그중의 하나이다.
공은 영조 임인(1722)에 태어나서 총명 영민한데다가 어려서부터 정훈(庭訓)을 익혀 시서(詩書) 백가어(百家語)를 모두 관통하였고, 장성하여 무과에 급제해서는 계해(1743)에 해남으로 나갔다가 을축(1745)에 곡성으로 이임되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횡성(橫城)으로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선치(善治)로 유명하였으므로 특별히 상주 중영장겸토포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재주와 뜻이 준정(峻正)하여, 관직에 있을 때 예로써 자제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정(私情)을 가지고 만나기를 청하지 못하였고, 정무(政務)에 임하여 염직(廉直)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제각기 은혜를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현대부(賢大夫)로 일컫고 있다.
그러므로 공의 신조를 논하면 ‘조상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고 기타 사소한 일은 다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그 7세손 기일(基一)이 공의 사행(事行)을 수습하여 나에게 행장을 청하기에 내가 그 자격이 아니라고 누차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이다음의 참고로 남긴다.
병신(1956) 봄에 야성(冶城) 송수근(宋壽根)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