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정유철(鄭惟轍)

통훈대부 행운산군수병마첨절제도위 유철부군 행장
(通訓大夫行雲山郡守兵馬僉節制都尉 惟轍府君 行狀)
무릇 덕이 있는 이는 말이 있게 마련이고, 그 말을 적어 전하면 문(文)이 되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뒷사람이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글이 산실(散失)되어 그 말을 증신(證信)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의 부형이나 사우(師友)를 보아서 그 성취한 까닭을 아는 것이다.
공의 휘는 유철(惟轍) 자는 명준(明準)으로 해주 정씨이다. 고(考) 휘 윤신(胤新)은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선생과 강좌(江左 權萬)선생의 문하에 수학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직접 전수받고 과거에 종사하지 않았다.
오직 경서(經書)를 힘쓰고 이치를 탐구하여 마침내 큰 선비를 이루었다. 비(妣)는 창녕 조씨(曺氏) 첨지 하관(夏觀)의 따님으로 현숙한 행실이 있었다. 계해(1743) 10월 8일에 신포리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과 재기(才器)가 뛰어났고 일찍부터 정훈(庭訓)을 복습하였으며, 백씨 만포공(晩圃公)과 함께 한 책을 강마(講磨)하여 그 질의하고 정진하는 성적이 날이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일찍이 조명국(曺明國) 정필검(鄭必儉)과 절친하였고, 서로 토론하여 학문수양에 많은 도움이 있었다. 공이 평소 저술한 글은 화재에 없어져 그 진덕(進德)의 깊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부형 사우(師友)를 보면 그 대개를 짐작할 수 있다.
갑진(1784)에 무과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운산군수로 나가, 백성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다. 재물을 쓰는데 검약을 위주로 하므로, 백성이 각기 그 직업에 안정되었다.
또한 선조 신당선생이 성희안(成希顔)에게 답한 편지 중에, 잣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속에 있다는 구절을 써서 좌우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미(1799) 2월 2일에 57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하여 선산 무을면 안곡촌(案谷村) 뒤 경좌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동래 정씨(鄭氏) 명동(鳴動)의 따님으로 임술(1742)에 출생하고 임술(1802)에 세상을 떠나 공에게 부장(附葬)되었다.
공의 묘지를 잡아준 사람은 일찍이 죄에 걸려 운산 감옥에 수감되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적에 공이 상세히 밝혀서 그 억울함을 알고 구제해 주었는데, 그 사람은 평소 지리에 밝은 사람이고 보은하는 뜻에서 이 묘지를 선정해 주었다 한다.

아! 공은 온후하고 신중한 자질과 통달한 재주로 안에서는 정훈을, 밖에서는 훌륭한 스승의 교육을 받았으니, 그 성취가 다만 여기에 그칠 뿐이 아닐 터인데, 그 수명이 덕행에 걸맞지 아니하여 능히 세상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공의 현손 근우(根禹)는 평소 공의 문적이 산실되어 그 아름다운 언행이 영원히 세상에서 인멸되어 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왔다.
그러므로 가정에서의 견문과 향당에서의 추앙들을 수집하여 나에게 행장을 청하였다. 내 비록 문재가 없으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줄거리만을 대략 기록하여 이다음 집필 군자를 기다린다.

을미(1955) 동지(冬至)에 종 5대손 우섭(禹燮)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