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정선(鄭選)

절충장군 행사헌부 감찰 겸호위장 화재 정공 선 행장
(折衝將軍行司憲府鑑察兼扈衛將和齋鄭公 選 行狀)
조선조 3백년 동안 성운(盛運)이 든든하여 훌륭한 임금이 위에 있고 어진 신하가 아래에 있어 그 교화가 융성한 중에 정조(正祖)가 요·순의 자질과 정주(程朱)의 학문으로 충량(忠良)과 현재(賢才)를 가려 등용하였다.
그러므로 3공·6경에서 백관과 각 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 직책을 얻었는데, 그때 문무를 겸비한 재목으로 임금의 총애를 입은 이는 바로 정공 선(鄭公 選)이었다.
공은 8척이 넘는 신장에 음성이 천둥소리와 같고 안광이 횃불과 같아서 깜깜한 밤에도 가는 글자를 보았으며, 여력(膂力)이 뛰어나 철여의를 부러뜨렸다. 왕이 훈련원에 거둥하여 뭇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무예를 시험할 때, 공이 철궁을 당겨 원목(院木)을 향해 발사하니, 아름드리나무가 시위소리를 따라 부러져 그 소리가 온 원내(院內)를 진동시켰다.
왕이 크게 칭찬하는 한편, 어전에서 공의 이름을 선(選)으로 하사하고, 그날로 사헌부 감찰 겸호위장(司憲府鑑察兼扈衛將)에 임명하였다.
이어 왕이 이르기를,『아! 내부에 일이 있으면 너를 동량으로 삼고, 외부에 어려움이 있으면 너를 간성(干城)으로 삼을 것이다』하였으니, 이는 이전에 없었던 대우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처음 휘는 선(璇)으로 여칠(汝七)은 자, 화재(和齋)는 호이다.
공은 기품이 탁월하고 도량과 재간이 크고 넓었다. 어버이의 명으로 화암(華巖) 이사정(李師靖)의 문하에 수학하여 학문하는 요결(要訣)을 체득하였고, 무신(1788)에 아버지 만포공(晩圃公:惟城)의 상을 만나 정과 예를 아울러 다 하되 일체 옛적의 제도에 따랐다.
또 모친을 엄부처럼 섬기어 가정의 크고 작은 일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반드시 여쭈어서 처리하였다. 새로 나온 식물이나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가져다 드렸고, 모친의 상을 당해서는 슬퍼하는 절차가 일체 전상(前喪)과 같았다.
공은 일찍부터 그 재략(才略)을 스스로 사랑하여 평소에 개탄하기를,『시서(詩書)를 담론(談論)하면서 병혁(兵革)을 담당한 이는 옛날에 극곡(郤穀)이 있었다.』하고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손·오(孫吳)의 병법을 모두 통하는 한편, 붓을 던지고 궁마(弓馬)를 익혔다.
정조 을묘(1795)에는 무과에 올라 바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병진(1796)에는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와 내금위(內禁衛)로 옮겼고, 정사(1797)에는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로 임명되었다.
이때 은총이 융숭하고 전도(前途)가 한창 열렸다. 조회가 끝난 뒤에 왕이 문무제신에게 이르기를,『경들은 이다음 국가의 주석이 될 정선(鄭選)을 알고 있는가.』하였으므로 당로자(當路者)가 공에게 장재(將材)를 기대하였다.
마침 권문(權門)에서 세력을 믿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공이 감찰의 규례를 들어 그 집 대문을 묵쇄(墨刷)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오늘에 다시 총마 어사(驄馬御史 : 후한 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환전=桓典=을 이름)를 구경하게 되었다.』하였다.
그 뒤부터 공을 시기하는 자가 많아지고 두려워하는 자가 집중되어 대간을 부추겨 공을 탄핵하여 경망하다는 죄목으로 호남에 정배시켰다.
번암(樊庵)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정선(鄭選)이 강직으로써 쫓겨난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하자 왕이 옳다하고 손수 도부장(到付狀)을 제(題)하기를,『연소한 무신이 행동을 약간 실수하였기에 특별히 정배를 풀어 준다.』하였다.
공이 돌아오자, 이전 직책을 환원시키고 말 한필을 하사하였다. 마침 생부 부사공(府使公: 惟轍)의 병으로 하향하였는데 시탕한지 몇 해만에 상을 만나 3년 동안 집상(執喪)하였다.
경신(1800) 6월에는 정조가 승하하자, 즉시 본부(本府)에 들어가 곡하고 길을 떠나 상경하여 부모의 상과 같이 애통해 하였다. 그 뒤부터 지기(志氣)가 풀려 세상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다. 고향으로 돌아와 구원(丘原)에 뜻을 붙이고 책상에 그득한 금서(琴書)와 정원에 심어둔 꽃과 대나무로 한가로운 의취를 즐겼다.
임술(1802)에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 금 수천 돈과 곡식 수백 섬을 털어 향리의 빈궁한 자를 구제하였으므로 그 송덕비가 온 경내에 자자하였다. 집에 있은 지 20년 동안에 충의로 갑주(甲冑)를 삼고 효제(孝悌)로 간로(干櫓)를 삼아, 임금을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침식하는 사이에도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
가끔 취기가 돌면 강개한 심사로 시를 읊곤 하였다. 즉,『칼집에 먼지 끼고 서안(書案)에 좀 일고 몸마저 늙었으나 기(氣)는 무지개와 같네. 선조의 해와 달 위에 비쳐 있는데, 언제 하늘에 올라 그리운 님 뵈려나』하였고 또 이르기를, 『주자가 취하면 곧 공명(孔明)의 출사표(出師表)를 노래하고 육방옹(陸放翁 : 陸游)이 완화강(莞花江)에서 철갑을 생각하였으니, 이 어찌 유가(儒家)의 무(武)가 아니겠는가』하였다.
매일 일찍 일어나 의관을 바르고 가묘를 알현한 뒤에 경훈(經訓)을 읽었으므로 향당에서 칭하기를,『무(武)에서 유(儒)로 돌아왔으니, 송당 박영(朴英 1471~1540)의 고장에 다시 그 사람이 나왔다』하였다.
경진(1820)에는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고, 신사(1821)에는 절충장군으로 승진되었다가 바로 첨중추 겸충장위장(僉中樞兼壯衛將)에 임명되어 성근(誠勤)을 다하여 봉직하였다.
퇴근한 여가에는 당시의 명승(名勝)을 벗으로 하여 세상에서 벗어나 거닐 뿐 절대로 시정(時政)의 득실이나 당론의 여하를 입 밖에 내지 않으면서, 『우리는 다만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말하는 것이 본분이다』하였다. 신사(1821) 8월 20일에 54세를 일기로 서울 집에서 고종(考終)하였다.

아! 정조 을묘(1795) 정사(1797)연간에 문무의 충의로운 신하가 차례로 진출되어, 기강이 위에서 세워지고 교화가 아래서 행하여 졌다.
그러므로 거의 태산처럼 안정되고 반석처럼 굳건함을 바랐다. 국운(國運)을 찾아볼 길이 없으니, 이는 이른바 물에서 배를 잃고 망연히 건널 바를 알지 못하는 격이 되었다.
그 뒤부터 간당(奸黨)이 농권(弄權)하여 정인(正人)은 물러나고 잡류가 득세하여 옛날의 명검이 도리어 무디어 지고 말았다.
더욱이 공의 괴오 우뚝한 자품과 굉박(宏博)한 재략으로, 이를 만에 하나도 펴지 못하고 수명 또한 50여에 그쳤으니, 어찌 후세 상론자(尙論者)의 무한한 개탄과 유감이 도지 않겠는가.

윤상(允相)은 약관적 부터 이웃 부로들에게 공의 행적을 익히 듣고 나서 그윽이 감탄하기를, 공은 마지막 호걸이다 하였다.
이번에 그 종손(宗孫) 재윤(在潤)이 집안의 오래된 쪽지와 보첩 중에 가장 드러난 기록을 모아 가장(家狀)을 서술하여 나에게 한마디의 말을 청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이다음의 덕을 아는 이를 기다린다.

옥산 (玉山) 장윤상(張允相)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