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 정종현(鄭宗鉉)

통정대부 행부령부사 청주진 중영장 겸토포사 정공 종현 행장
(通政大夫 行富寧府使淸州鎭中營將兼討捕使 鄭公宗鉉 行狀)
공의 성은 정씨, 휘는 종현(宗鉉), 자는 치굉(致宏), 본관은 해주이다.
소시에 비록 무예를 익혔으나, 조행(操行)이 조촐하고 의론이 정직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다 훌륭한 그릇으로 일컬었다.
나이 30에 무과에 올라 현직(顯職)을 역임하여 명성이 자자하였고, 병진(1856)에 곽산군수에 임명된 지 몇 달 만에 치적이 크게 올랐으므로 어사가 상주하기를,『관고(官庫)에는 아껴쓰고 남은 전곡이 있고, 촌민에게는 누락된 억울한 송사(訟事)가 없다.』하였다.
관찰사의 포계에서는 『절약 검소를 좋아하고 일의 선후를 알아 민정이 청명하고 백성이 약속을 지키고 관청이 언제나 한가롭다』하였고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워 이르기를, 『요약(要約)된 군자이고 청백한 양리(良吏)이다』하였다.
정사(1857)에 부령부사로 전임되어 부임하는 즉시 12조의 규령(規令)을 각 마을에 두루 돌렸는데, 근간(勤懇)하고 우휼(優恤)하는 뜻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여 분발시킬 만하였다.
또 어사가 상주하기를, 『성실하고 곧은 성격으로 부지런히 치도(治道)를 행하여, 규령이 실현되니 향약이 새로 각 방(坊)에 반포되고 단속이 엄격하니 관리가 다 초정(初政)에 무서워했다』하였다.
돌아올 적에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칭송하는 행사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즉,『한 병속의 맑은 어름이오, 온 경내의 순후한 풍속이다』하였고 또, 『지친 백성이 정후(鄭侯)를 만나 소생했다』하였다.
또 청주에 있을 때 관찰사가 포계하기를『진(鎭)에 있은 지 반년 사이에 명성이 온 경내에 퍼졌다.
강직하고 밝은 치적을 군민이 다 칭송한다』하였고 비문에는, 『온화 담박하고 염직 공평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떠나는 것을 애석해 하여 너도 나도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고 하였다.
병인(1866)에 양이(洋夷)가 강화를 침범하였을 때에는 온 고을에 통문을 돌려서, 의연(義捐)에 호응하여 군수(軍需)를 돕자는 뜻으로 간곡히 효유하자, 어린아이 노인까지도 모두 감격하여 앞을 다투어 나섰으니, 그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충심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또 그 척사문(斥邪文)은 말의 뜻이 엄정하여 도저히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본디가 있는 학력(學力)은 물론 정대한 기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또 마을의 노소들과 더불어 사계(社禊)를 창립하였는데, 그 규약은 옛날 남전(藍田)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남아의 사업이 비록 한 나라에는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어찌 한 마을에야 실현되지 못하겠는가. 만약 나를 써 주는 이가 있다면, 서슴없이 실현에 옮기겠다』고 하였다.
선조의 묘 중에 석물이 미비 된 곳에는 자금을 규합하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족친 중에 빈궁해서 의지할 데가 없는 자는 거두어 양육해 주었으며, 거마나 의복까지도 미련 없이 이웃과 함께 이용하였으므로 임술(1862) 민란 때에 난민들이 공의 대문 앞을 지나면서 서로 경계하기를,『떠들지 말라. 정영공(鄭令公)을 놀라게 할까 두렵다』하였으니, 공이 평소 사람들에게 얻은 인심이 이러하였다.
공의 저술한 시문이 비록 많지 않으나 그 격조가 맑고 깨끗하며 아름다우니 어찌 꼭 많아야만 되겠는가. 부인 의흥 박씨(朴氏)는 경문(慶文)의 따님으로 정숙하고 아름다운 부덕이 있었으며, 기미(1799)에 나서 병자(1876)에 별세하고 공의 묘에 부장(附葬)되었다.
나는 이미 늙어서 감히 문자를 다룰 수 없는데, 공의 증손 관섭(寬燮)이 행장을 청하기에 누차 사양하다가 할 수 없어 사실대로 서술하여 이다음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채택을 기다린다.

숭록대부 행형조판서 경연 춘추관 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 학사 규장각 제학 기사당관(崇祿大夫行刑曹判書經筵春秋館知義禁府事弘文館學士奎章閣提學耆社堂官) 인동(仁同) 장석룡(張錫龍)은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