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정석견(鄭錫堅)

가선대부 행 이조참판 한벽재 정선생 행장(嘉善大夫行吏曹參判 寒碧齋鄭先生行狀)
공의 휘는 석견(錫堅), 자는 자건(子健)이고, 한벽(寒碧)은 그 자호이다.
처음 성균관에 추천되었다가 성종 때 준량(俊良)으로 부름을 받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었다. 비안 지례 금산으로 나가서는 이르는 곳마다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더러는 돌을 세워 칭송하였고, 청백리로 뽑혀 사헌부에 들어서는 언행이 꼿꼿하여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는 간관의 풍도가 있었다.

성종 계사년(1473)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천추절을 축하할 때 임금이 서장관을 선발하였는데, 공이 여기에 응하여 배행하게 되었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전송하면서,『중국에서 사람을 알아보는 이를 만난다면 반드시 해외에 이 사람이 있음을 알 것이다』하였다. 본국에 돌아올 적에는 행장이 초라하였고, 오직 중국 사람의 운어(韻語)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갑오(1474)에 대과에 합격하여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질투하는 자가 사간원에서 모해하여 형조에 좌천 되었다가 홍문관에 들어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이전에 홍문관에 하인이 없었으므로 출입할 적에는 다른 부서에서 빌렸는데, 공만은 이를 빌리지 않았다. 매번 하인 한명으로 앞길을 인도하게 하고 다른 한 명으로 뒤를 따르게 한 뒤에 공은 가운데서 말을 몰아 그 모양이 산자(山字)와 비슷하였으므로, 이를 보는 이들은 서로 웃으며 산자관(山字官)이라 일컬었다.
동료들이 농으로 묻기를,『한 하인을 빌리는 일이 의롭지 않은 것도 아닌데「산자관」이 되는가』하자 공은, 『뒤따르는 하인을 두는 것은 등 뒤의 일이므로 내가 보이지 않는 바이고 구사를 빌리는 것은 눈앞의 일인데, 내가 어찌 구차히 빌리겠는가. 아예 산자관이 되겠다』하였다.
사헌부 집의나 사간원 사간으로 있은 지 십 수년만에 동부승지에서 좌승지로 승진되었다.
또 대사간이 되어서는 대궐에 관련된 뜬소문이 있었는데, 그 말이 간원(諫院)에서 나왔다 하므로 임금이 진노하여 친국에 임하였다.
모든 신하가 벌벌 떨었으나 공은 조금도 꺾임 없이 조용히 무릎을 모으고 흐느끼면서, 『신은 이미 늙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신을 죽이면 임금께 누가 될까 염려입니다』하였다.
임금은 본시 공을 대우함이 남달랐던 터이라 낯빛을 고치며 죄를 내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 각 조(曹)의 참의를 거쳤고 가끔 외임으로 나가기도 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제수되어서는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다. 극력 휴퇴를 얻어 경신(1500)정월에 집에서 고종(考終)하자, 사방의 아는 이나 모르는 이가 다 와서 조상하였다.
공은 얼굴빛이 한결같고 몸가짐이 엄숙하며, 밖으로 온순하고 내부로 방정하였다.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단속하여 모든 동작에 절도가 있었으며,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정주(程朱)의 모든 글도 마치 자신의 말처럼 막힘없이 외웠고, 두 형 철견(鐵堅)·은견(銀堅)과 더불어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점필재·한훤당·매계 등 제현이 한번 사귀기를 원하였으며 지나는 사절들이 다 허리를 굽히곤 하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어 일찍이 조카인 신당 붕(新堂 鵬)에 대해 이르기를,『이는 우리 집안의 옥수(玉樹)이다』하고는, 한훤당의 문하에 들어가 처신하는 법을 배우게 하였고, 또 서울로 데려다가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쳐 마침내 큰 선비로 성취시켰다.
그때 제현들이 무성하게 일어나 거의 송나라 순희(淳熙)시대와 같이 신도(信道)만으로 곧 바로 나아가고 신중을 기하지 않으므로 공은 매우 걱정하여 신당(新堂)에게 경계하기를,
『군자가 처세하는데 비록 궤술(詭術)을 사용할 수 없으나 유속(流俗)과 간격을 두어 그들의 모해를 입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이는 동한(東漢) 말기의 당화(黨禍)를 걱정한 것인데, 그 뒤에 과연 3대 사화가 일어나 선량한 선비들이 모두 주륙을 당하고 그 화가 묘에 까지 미쳤다. 그러나 신당은 유배에 그치고 말았다.
공은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고 이름난 고장을 거쳤으나 얼음장 같은 지조가 시종 한결같아, 집으로 돌아온 뒤에 가세가 초라하여 이전과 다름이 없었고, 매년 봄과 여름철이 되면 아들 부(鳧)를 시켜 오소근을 캐어 자급하였다.
일찍이 공을 방문하는 손이 역마를 타고 공의 집 앞 못 가에 이르렀는데, 곳곳마다 구덩이가 패여 마치 밭을 갈아 놓은듯 하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기어 아전에게 묻자 아전이 근자에 정공(鄭公)이 새끼 딸린 돼지를 기르고 있다고 둘러 댔다.
그 손님이 공을 뵙고 이를 이야기하자 공은 웃으면서,『진짜 돼지가 아니라 돈아(豚兒 : 자기 아들을 낮춰서 이르는 말)의 소행이다.』하였다. 그 빈한함이 그와 같았으나 조금도 외물(外物)에 미련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어질게 여기어 당시의 고사(高士)를 논하는데 으레 공을 첫째로 꼽았다.
학문의 정밀함과 조예의 깊음도 사람마다 알 수 있는바 아니었으나, 조정에 나간 지 수년에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으며 또 가법을 이을 만한 어진 이가 없었고 신당(新堂)까지 일찍 별세하여 공의 평소 아름다운 언행(言行)이 다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공의 방손 유욱(惟旭)이 나에게 가장(家狀)을 보이고 한마디의 말을 가하여 그 유광(幽光)을 천양해 달라 하기에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위와 같이 서술한 것이다.

후학(後學) 서원(西原) 정 필검(鄭必儉)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