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정은견(鄭銀堅)

고조고 진사 수곡 휘 은견부군 행장(高祖考 進士修谷銀堅府君行狀)
공은 일찍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다스렸고 학문으로 사림에게 존경을 받았다.
성종(1469~1494) 연간에 덕행이 있는 이를 추천할 때 조정에 알려졌으나, 스스로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명리의 지름길에 나갈 수 없다 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산림에 묻혀 즐기며 문수봉(文修峯) 아래 집을 짓고「수곡서실(修谷書室)」이라 하고 수신을 선무(先務)로 삼아 대학(大學)을 전공하였고, 세상을 멀리하여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감문지방의 풍속이 본디 술 마시는 일로 습관이 되어 왔는데, 공만은 초연히 자립하여 후생을 가르쳤으므로 당시의 제현이 다 칭송하였고, 도학 문장과 효자 열부가 서로 이어 배출되었다. 그 속상(俗尙)의 아름다움을 상고해 보면 공의 가르침에서 나와 마치 물이 근원에서 출발되는 것과 같았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건조하고 하천이 낮으므로 논밭이 해마다 가뭄을 타서 거의 황폐되기에 이르러 주민의 생업이 매우 곤란한 실정이었다.
경자년(1480) 봄에 문수봉에 올라 물이 나서 고인 곳을 발견하여 둑을 쌓았으니, 바로 탄동지(炭洞池)이다.
내를 끌어 물을 저축하고 계곡을 거쳐 보를 만들어, 오수정(五綏亭) 밖 몇 리까지 관개의 이익을 주었다. 그때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선생이 개령현감으로 있으면서 도의의 사귐으로 끊임없이 상종하였다.
드디어 탄동지 남쪽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 놓고, 매년 봄날이 화창해지면 이곳에 나와 거닐고 술을 들며 시를 읊으면서 오언시 한 수를 남겼다. 즉, 『봄 못이 깊고 넓어 우리 밭에 물 대니, 이제는 가뭄 없이 우리 농사 풍년일세』하였다.
공의 휘는 은견(銀堅), 자는 자진(子珍), 호는 수곡(修谷)이고, 신당 정붕(新堂 鄭鵬)선생은 그 조카이다.

현손 후시(厚時)는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