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정철견(鄭鐵堅) 행장

통훈대부 행함창현감 송정 정공철견행장(通訓大夫 行咸昌縣監 松亭鄭公鐵堅 行狀)
공의 휘는 철견(鐵堅), 자는 강수(剛叟), 성은 정씨이다. 해주에서 개성으로 이주하여 7세 동안 큰 벼슬이 이어졌다. 대장군 휘 초(初)는 고려 말기를 만나 거짓 미친체하며 영남 선산에 은둔하였는데, 자손이 이내 여기서 살았다.
그 아들 생원은 휘가 윤성(允成)이고, 그 아들 영동정(令同正) 증 호조참의는 휘가 희언(希彦)이며, 아들인 교도(敎導) 증 이조참판은 휘가 유공(由恭)인데, 공의 증조·조부와 부친이 된다.
비(妣)는 옥천 육씨(陸氏) 교도(敎導) 잉(仍)의 따님으로, 세종 신해(1431)에 감문(甘文) 탄동(炭洞)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뜻이 독실하고 학문에 전력하여 덕행 문장이 당시에 추중(推重)되었고,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 매계 조위(梅溪 曺偉) 등 제현이 함께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그때 청명한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논쟁을 일삼아 마치 동한(東漢) 말기와 비슷하였으나, 공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평온하게 처세하여 부딪침이 없었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는 즉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송정(松亭) 사이에 은둔하여 학문을 힘쓰는 여가에 후생을 가르치는 일로 낙을 삼았다. 감문의 풍속이 본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외연히 자립(自立)하였으므로 제현이 다 칭찬하였다.
성종이 즉위하여 덕행이 있는 이를 추천하라 하므로, 공이 중씨 은견(銀堅), 계씨 한벽재 석견(寒碧齋 錫堅)과 함께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중씨는 끝내 나오지 않고 계씨는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공은 혹 사양도 하고 혹 나아가기도 하여 여러 차례 전임 끝에 거창현감이 되었는데, 관청 일을 집안일처럼 다스렸으므로 관리와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안착하였고, 다시 함창현으로 옮겨진 지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전야에 은거하다가 약간의 수명(壽命)으로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천성이 준정(峻正)하고 몸가짐이 법도가 있어, 아무리 가인과 부자 사이라 해도 사색(辭色)을 늦춰 주지 않았다. 항시 자제들에게 꾸짖기를,『처음 배우는 자가 만약 학문을 미루고 게을리 한다면 어떻게 성취하겠느냐. 모름지기 굳세고 강하며 독실한 뒤에야 성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한벽재와 신당(新堂 : 鄭鵬) 두 분의 학문이 정밀하여 능히 백대의 명성을 수립하였으니, 그 연원이 대개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공의 11세손 유욱(惟旭)이 나에게 공의 행장을 청탁하면서 『선조가 별세한 지 이미 3백여년으로 사적이 다 마멸되었고, 다만 가승(家乘) 및 감문지(甘文誌) 탄동기(炭洞記)와 점필재집(佔畢齋集)에 보이는 것뿐이나, 그 대략은 짐작할 수 있다.
어찌 한 마디의 말을 가하여 밝게 선양해 주지 않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렇다. 이는 봉이 남기고 간 한 개의 깃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하고, 드디어 위와 같이 서술한 것이다.

서원 후인(西原 后人) 정필검(鄭必儉)은 삼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