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정붕(鄭鵬) 신당 행장

통훈대부 행홍문관 겸 경연춘추관 참찬관 기주관 신당 정선생 행장
(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兼經筵春秋館參贊官記注官 新堂 鄭先生 行狀)
선생의 휘는 붕(鵬),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이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기국(氣局)이 크고 식도(識度)가 뛰어났다. 숙부 참판공 석견(錫堅)이 그 재기(才器)를 매우 중하게 여기면서, 우리 집안의 옥수(玉樹)이다 하고는, 드디어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문하에 수업하여 군자의 처신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서울로 데려갔는데, 지도가 필요 없이 학업이 날로 진취되었다.
그때 남효온(南孝溫)이 명성을 떨치고 호탕하여 구애되는 바가 없었으므로 선생은 함께 교유하였다. 참판공이 교유를 경계하고 성리서(性理書)를 가르치자, 선생은 숙부의 명을 따라 깊이 연구하였고, 명리(名利)의 추구를 단념하였다. 또 참판공의 명으로 병오(1486) 진사시에 응하여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의 방하(榜下)에 합격하였다.
종중 반정 이후에는 관직(館職)으로 부르자, 선생은 가족을 거느리고 상경하다가 도중에 신병을 이유로 다시 돌아와 고향에서 재미있게 노닐며 일생을 그대로 마치려는 뜻을 두었다.

정승 성희안(成希顔)이 임금께 아뢰기를,『정붕은 순정(淳正)한 선비입니다. 성명(聖明)한 세대에 그를 오래도록 초야에 버려둘 수 없습니다』하자 상께서는『초야에서 밭 갈던 이와 동해에서 고기 낚던 이가 도덕을 간직하고 어부와 초부 사이에 섞여 있었으니, 만약 추천이 없다면 내가 어찌 그를 알 수 있겠는가』하고 교지를 내려 불렀다.
선생은 드디어 입조하여 교리(校理)를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승문원 참교(參校)·사간원 사간(司諫)을 역임하다가 술병을 핑계로, 조정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의 벗 신개지(申漑之)·박열지(朴說之)가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의도를 알았다.
기사(1509)에는 청송부사에 제수되어 간결(簡潔)로써 다스려 정화(政化)가 크게 흡족하였고, 임신(1512) 9월 19일에 46세를 일기로 관사에서 별세하자, 청송부 서쪽 복우산 유좌에 장사 지냈으니 그 선영을 따른 것이다.
선생의 한 벗이 영남의 관찰사로 선생이 고단하고 빈한하여 장사가 어려움을 알고, 영남의 수령으로 있는 그 벗들을 모아 상사를 돕자고 하자 풍기군수 임제광(林霽光)이 비석을 맡아 건립 하였다.
선생이 지은 시문·주차(奏箚)는 병화로 없어지고 지금 남은 것은 시 네 수와 안상도(案上圖) 뿐이다.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정선생의 정미(精微)로운 학문은 마땅히 이 그림에서 보아야 한다』하였다.
송당 박영(松堂 朴英)이 처음 군무에 종사하다가 선생을 따라『대학』을 배웠다. 선생은 낙동강 상류로 송당을 찾아서 냉산(冷山)을 가리키며 묻기를,『저 밖에 또 무엇이 있는가』하자, 송당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수년 뒤에 선생은 또 그렇게 묻자 송당은 대답하기를,『외면(外面)이 다만 전면(前面)입니다』하므로 선생은 웃으면서, 이제야 자네가 글을 읽어 그 얻음이 있음을 알겠네』하였다.
선생은 더욱 노론(魯論:논어의 이본)에 깊었다. 일찍이 말하기를,『논어(論語)』의 글은 내가 직접 오랑캐를 가르치더라도 능히 그 대의(大義)를 알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다』하였다.
연산군 초기에 선생은 공무로 서울에 있다가 사람에게 말하기를, 『문묘의 위판(位版)이 절에 옮겨지는 꿈을 꾸었으니,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다』하였는데, 그 뒤에 태학(太學)이 유연장으로 변하고, 문묘의 위판이 산사로 철회되었으니, 이는 선생이 추악한 사태가 벌어질 줄을 알았으면서도, 꿈을 가탁하여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때 강혼(姜渾)과 심수문(沈須門)이 의정부 사인(舍人 : 정4품)으로 각기 좋아하는 기생이 있었다. 선생은 속히 이를 멀리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 것을 권유하자, 강공은 그대로 따르고 심공은 듣지 않다가, 그 뒤에 두 기녀가 궁중에 뽑혀 들어가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관계로 심공은 마침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이 홍문관에 있을 때, 일시의 명사들이 다 선생을 믿고 의지하였다. 연산군이 정성근(鄭誠謹)을 죽이고자 하여 홍문관에 물었을 때, 여러 사람이 다 선생의 결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이 뒤에 도착하여, 정성근은 죽어야 한다고 하므로 온 좌중이 깜짝 놀라자 선생은『한 사람의 죽는 것은 여러 사람의 죽는 것에 비해 어느 편이 더 나은가』하였는데 퇴계선생이『변을 잘 처리하는 도를 얻었다』하였다.
송당(松堂)이 일찍이 급히 달려와서 선생을 뵙고, 박경(朴耕)과 조광보(趙光補)가 장차 죽게 되었다고 하자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한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이는 반드시 문세고(文世皐)의 소행이다』『논어에 어질(仁)면서도 배우지 못하면 그 폐단이 어리석다 하였는데, 박경이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였으니, 화를 반드시 면치 못할 것이고, 조광보는 반드시 면할 것이다』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되었다.
집이 가난하고 녹봉(祿俸)이 박한 처지인데, 어느 날 퇴근하였을 때 밥상이 들어왔다. 선생이 어디서 준비했느냐고 묻자 부인이,『오늘 아침에 여종이 유자광의 집에 갔었는데 유가, 정모(鄭某)가 고집을 세워 나를 만나 주지 않는다 하고, 몇 말의 쌀을 보내 왔습니다』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입조할 때 식량이 떨어진 줄을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이오』하고는 밥상을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선생은 세상의 변고를 직접 겪어 온 터이라 관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그저 담담하여 궁중에 드나든 지 십수년에도 품계가 승진되지 않았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벼슬길에 진취할 수 있었으나 누차 불러도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혹 입조하더라도 몇 달이 되지 못하여 그만 두므로 누가 그 까닭을 물었다. 선생은 이르기를,『내가 시독(侍讀)으로 정원문(政院門) 밖에서 입궐하려 하는데, 서대(犀帶:일품관의 띠)를 두른 한 재상이 내 앞에 등을 돌리고 서 있기에 내가 놀라서 숨을 죽이고 서서 그 면모를 언뜻 보았더니, 바로 찬성 홍경주(洪景舟)였다. 나는 여기에 내심 놀라 벼슬에 뜻이 없어진 때문에 그만 물러가려던 참이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처음 성희안(成希顔)과 서로 아는 터이다. 선생이 청송부사로 있을 때 성희안이 편지를 보내 잣과 꿀을 요구하였다.
선생은 답하기를,『잣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 속에 있는데, 태수가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하자, 성희안이 괴복(愧服)하고 말았다.
아! 지금 선생이 간지 234년에 그 성광(聲光)이 멀어지고 문자를 증거할 수 없으며, 연원록(淵源錄)에 기재된 것도 몹시 단편적이어서 그 공훈을 널리 펼칠 수가 없다.
그러나 맹자의 말에,『그 사람의 시를 외고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옳겠는가.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세대를 따져서 논 할 수밖에 없다』하였고 전(傳)에서는『사람의 선(善)을 칭할 적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부형과 사우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하였으니, 지금 이 기록을 상고하여도 해주가승(海州家乘)을 참고해 보면, 선생의 순수한 가훈과 깊은 학문을 말할 수 있다.
즉, 선생의 부친 철견공이 성종 때에 추천을 받았으며, 참판공이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고 김굉필·조위 등 뭇 선생과 도의(道義)의 사귐이 되었으며 성리학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므로, 당시에 한벽재공의 어짊을 칭찬하였다.
한벽재공은 또한 선생을 가르치면서 자신을 위한 학문에 힘쓰고 일체 명리를 가까이하는 행동이 없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풍절(風節)이 높은 남효온과 교유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그 높은 식견이 그 뒤의 화를 이미 은연중에 예측한 것이오, 응시(應試)를 명한 일도 명성을 얻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크고 위대한 자품과 준정(峻正)한 천성이 그 예봉을 거두고 의리에 젖었으며 또 김굉필을 종유(從遊)하여 직접 그 지결(旨訣)을 받아 초연히 무우에서 바람 쏘이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다는 증점(曾點:증자의 아버지)의 지취를 갖게 되었으니, 선생의 깊고 후한 소양과 정미(精微)한 조예를 알 수가 있다.
더욱이 연산군 때 대신들이 도륙되고 선비들이 몰살되었으나, 선생만이 초연히 화를 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선생은 학술이 이미 순수하고 조감(藻鑑)이 매우 밝아, 유자광이 보낸 쌀로 지은 밥상을 물리치며 자신을 꾸짖었고,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홍경주를 보자마자 그 위인을 등 뒤에서 간파하고 화가 신변에 닥쳐올 것을 직감하여 급류에서 용퇴하였으며 조광보·박경의 일을 앉아서 추산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었고, 심수문 강혼의 사생(死生)이 선생의 말을 따르고 안 따른데 있었으니, 군자의 일언일동(一言一動)은 다 세상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정성근의 죽음을 구제하지 않은 데에도 반드시 논설이 있었을 터이나 세대가 멀어서 알 수 없다.
신귀(神龜)처럼 기미(機微)를 간파하여 장래를 정확히 짐작했는가 하면 자취를 초원에 감춰 마침내 그 몸을 보존하고 또 명도(名塗)에서 물러섰으니,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아! 우리 할아버지 충재 권발(沖齋 權襏)이 사원(史院)에 있으면서 쓰기를, 『정붕은 기도(器度)가 웅위(雄偉) 하였으나, 명예를 구하지 않고 사환(仕宦)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외임(外任)을 청하여 마침내 청송에서 별세했다』고 하였다.
현인의 후예가 7-8세 동안 크게 번창하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보시(報施)가 이다음에 있을 것이다. 삼가 기록하다.

후학 통훈대부 전 행 병조좌랑(前 行兵曹佐郞)
영가(永嘉) 권만(權萬)은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