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인물(歷代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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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鄭崗) 남양부사 을경(乙卿)의 아들 조선이 개국하는데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에 선록되었는데 당시의 관직은 연산부사였고 사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견(鄭堅) 1509~? 자(字)는 옥지(玉至). 현감 문우(文遇)의 아들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경조(鄭景祚) 1739 - 1820. 자는 사행(士行)이고 해원군 식(植)의 증손. 1775년 문과에 급제하여 1780년 자여도 찰방, 1786년 사헌부 장령, 1791년 『장릉지』의 개찬을 상소, 1796년 삭직, 1805년 통정대부로 승급, 1818년 가선대부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정광(鄭侊) 14? - ?.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며 생원 징(澄)의 아들이다. 1486년 진사에 입격하고 149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성균관의 기사관을 역임하였다.

 

정광시(鄭光始) 1820 - ?. 자는 미능(美能)이고 형조판서 천화의 아들이다. 1864년 문음으로 가감역, 와서 별제, 한성부 주부, 1868년 연기현감, 1871년 수원 판관, 187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 수찬, 병조참의를 거쳐 1875년 대사간, 승지, 부호군, 병조참지를 역임하였다.

 

정광연(鄭光淵) 1841(헌종 7)~1891(고종 28) 조선 말기의 문신. 민화(民和)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 교리ㆍ응교에 임명되었다. 1885년 통정대부에 이르고 1891년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정광운(鄭廣運) 1707(숙종 33)~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이(德而), 호는 휴휴자(休休子). 진후(震垕)의 아들이다. 1730년(영조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737년 지평이 되었고, 이어 정언을 거쳐 군수가 되었는데, 백성에 대한 형벌이 가혹하여 관찰사의 탄핵으로 사임하였다. 그 뒤 사성을 거쳐 장령에 취임하였는데 세자가 토론을 게을리 한데 대한 문책으로 1754년 삭직되었다. 기개와 절조가 있는 성격으로 권귀(權貴)에게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하여 관도를 떨쳤다. 안정복(安鼎福)과 우정이 두터워 그의 행장을 안정복이 썼다.

 

정광의(鄭光毅) 1729(영조 5)~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경(遠卿), 호는 묵재(默齋), 통덕랑 학신(學臣)의 아들이다. 6세에 부모상을 당하고, 1768년(영조 44) 사마시에 합격하여 1777년(정조 1)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직언을 잘 하였으며, 물러나서는 동호(東湖)에 대월루(對月樓)를 짓고 친구들과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정광훈(鄭匡勳) 1792 - 1842. 자는 여건(汝建)이고 183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1842년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정규(鄭逵) 1567 - 1623. 자는 유지(由之) 1605년 진사에 입격하고 1606년 정언으로 출사 1616년 문과에 급제하여 1617년 형조참의 1618년 연위사로 요동순안어사를 영접, 승지를 거쳐 1621년 대사간에 이름. 반정으로 피살되었다.

 

정기(鄭旗) 판서 강(崗)의 아들 조선 세종때에 선공부정(繕工副正) 겸 선공감 부정을 역임하였다.

 

정기원(鄭基元) 1898~1986. 학자ㆍ정치인. 부산출신.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또한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프린스턴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고 경남군정장관 고문을 지냈으며, 동아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부산 정, 무소속)에 당선되었으며, 1954년에는 제3대 민의원(부산 병, 자유당)에 당선되었다.

 

정난교(鄭蘭敎) 1863(철종 14) ~? 조선 말기의 개화당 광렴(光濂)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3월에 도일하여 1884년 육군호산학교(陸軍戶山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그해 8월에 남행부장(南行部將), 이어 좌영군사마(左營軍司馬)를 역임하고, 그해 말 갑신정변 때 사관생도로서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에 가담하여 서재필(徐載弼)의 지휘를 받아 경우궁(景祐宮) 내부경호에 힘썼으며,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인천에 내려가 치토세마루(千歲丸)호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에서 유혁로(柳赫魯)ㆍ신응희(申應熙) 등과 같이 김옥균ㆍ박영효의 신변보호를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파견된 이른바 자객 지운영(池運永)이 소지한 암살도구인 비수와 비밀서류 등을 압수, 그 정체를 폭로하여 위험을 모면하게 하였고,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하여 보내고,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자객 이일직(李逸稷)을 체포하여 일본경찰에 넘겼다.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청일전쟁을 계기로 1894년 12월 갑신정변 죄인에서 사면되고, 이를 전후해서 귀국, 이듬해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올랐으며,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 4월에 육군부령(陸軍副領)ㆍ군부대신관방장(軍部大臣官房長), 1907년 11월에는 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를 역임하였다.

 

정담(鄭憺) 동지 충석(忠碩)의 아들. 조선전기에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다.

 

정담수(鄭聃壽) 1550~1604 자는 덕수(德叟)통덕랑 종윤(宗允)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어란만호가 되었다. 왜적이 침법하여 변방이 소연할 때 충무공 이순신에 의해 좌선봉응양장군이 되어 모든 군무의 결정을 도왔다. 위난을 만나 제장과 더불어 곧장 적의 진영을 공격하여 영등포에서 당항에 이르기까지 적의 배 30여척을 소각시켰으므로 충무공이 그 공로를 논하여 공은 이를 사양하였다. 세상을 떠난 이듬해(1605) 1등의 공훈에 기록되었고 상신의 진언으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정도(鄭道) 1567~1633 자는 이지(履之) 이조판서에 추증된 문영(文英)의 아들 1613년 문과에 올라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1614년 사헌부 집의로 승진하여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광해시대를 만나 국정이 잘못되어 가자 문을 닫고 병을 요양하다가 인목대비 폐모론이 거론되어 이를 적극 저지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아니하자 산속으로 들어가 금서(琴書)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하옥되었으나 자명소를 올리고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의 변소로 곧 석방 되었으며 얼마 후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도인(鄭度仁) 1840 - 1875. 자는 순거(舜擧)이고 1867년 문과에서 장원하였으나 파방되었고 다시 187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역임하였다.

 

정도영(鄭道榮) 1601~1650, 자는 영지(榮之) 1627 생원급제,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사가 되었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정도형(鄭道亨) 1584(선조 17)~1645(인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지(亨之). 아버지는 봉사 광전(光前)이며, 어머니는 흥양유씨(興陽柳氏)로 현령 회(淮)의 딸이다. 1628년(인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에 봉직, 이어서 제용감(濟用監)ㆍ광흥창(廣興倉)ㆍ내섬시(內贍寺)ㆍ사섬시(司贍寺)의 참봉ㆍ봉사ㆍ직장을 거쳐 1631년에 전적이 되었다. 1636년 공조좌랑에 봉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이별하고 강화에 들어갔다가 난이 끝난 뒤에 황해도사ㆍ직강ㆍ사예를 지냈으며, 1645년 병으로 별세 천성이 관대하고 간묵(簡默)하여 희로 (喜怒)를 잘 나타내지 않고 관직생활에 청근(淸謹)하였다.

 

정동망(鄭東望) 1652~1700 자는 위로(渭老) 주부 호(頀)의 아들 생부는 영(韺). 1678년 무과에 올랐으나 이듬해 부상을 당하였다. 1685년에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생모의 상을 당하여 상을 마친 다음에 속리산에 들어갔는데 토포사와 함께 조령을 점령하고 있던 도적들을 소탕한 공으로 절충장군에 제수되고 다시 공주토포사가 되어 토적들을 인(仁)으로 무마하고 형으로 시위하는 한편 “너희가 너희의 죄를 안다면 내가 너희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너희의 본시 직업이 무엇이냐”고 하고 농사를 짓던 자에게는 농구를 주고 장사를 하던 자에게는 전곡을 주겠다고 한 뒤에 다시 도적이 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타일러 도적들이 감복하고 스스로 해산하여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숙천(肅川)으로 옮겨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는 요충지를 맡아 선정을 베풀어 전라좌수사로 승진하고 1693년에 통진으로 제수되었다가 옥천으로 전임된 지 1년만에 물러나 속리산에 들어갔다. 1698년 특별히 해미(海美l)에 제수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현명한 관리를 가려서 제수한 것이었으며 심력을 다하여 진휼하였다. 1700년에 충청병사로 올려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아니하고 별세하니 임금이 제문을 내렸다.

 

정문부(鄭文孚) 1565(명종 20)~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ㆍ의병장.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서울출신. 부사 신(愼)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하고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함경도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1592년 행영(行營)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등을 잡아 왜장 가토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최배천(崔配天)ㆍ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 각 진의 수장(守將)ㆍ조사(朝士)들과 합세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먼저 국경인ㆍ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ㆍ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長德山)에서 싸워 대승하고, 쌍포(雙浦)전투와 이듬해 백탑교(白塔郊)전투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1594년 영흥부사에 이어 온성부사ㆍ길주목사ㆍ안변부사ㆍ공주목사를 거쳐 1599년 장례원판결사ㆍ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 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에 이어 다음해 예조참판, 이어서 장단부사ㆍ안주목사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남원부사가 되고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北人)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있던 중 1624년(인조2)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詩)로 인하여 박홍구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고문 받던 끝에 별세하였다. 뒤에 함북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의해 신원(伸寃)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충의(忠毅)의 시호를 받았다.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 회령의 현충사(顯忠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 진주(晋州)의 충의사, 의정부의 충덕사(忠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정문진(鄭文振)1566 - 16? . 자는 순보(純甫)이고 부는 병절교위 수충(守忠) 이다. 1591년 진사에 입격하고 160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며 1610년 공사(供辭)로 입계, 1617년 군기시 부정으로 변고대처에 대한 상소. 1617년 임목대비에 대한 상소를 올렸고 군기시정을 역임하였다.

 

정문영(鄭文英) 1535∼1587, 자는 자발(子發) 호는 송재(松齋) 승지(惕)의 아들. 아들 조(造)도(道) 규(逵) 준(遵)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정문우(鄭文遇) (1479∼ ?) 집의 흔(忻)의 아들 흥덕 현감(興德縣監)을 역임하였다.

 

정문회(鄭文晦) 1563-1626, 승지 척(惕)의 아들로 자는 자명(子明)이고 음직으로 출사하였으며, 16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를 역임하였으나 1623년 반정으로 삭직되었다.

 

정미수(鄭眉壽) 1456(세조 2)~1512(중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기수(耆叟), 호는 우재(愚齋).
아버지는 형조참판 영양위 종(悰)이며, 어머니는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아버지의 유배지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소환되었다. 잠저 때의 성종을 시중하다가 1473년(성종 4) 돈녕부직장ㆍ형조정랑을 지냈다. 죄인의 자손으로 임관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무마로 무사하였다. 147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을 거쳐 이듬해 선전관을 지내고, 1489년 사헌부장령ㆍ사섬시첨정ㆍ한성부서윤ㆍ인천부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당상관으로 올라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고, 1496년(연산군 2)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98년 동부승지ㆍ우승지ㆍ좌승지ㆍ도승지를 거쳐, 1502년 공조참판ㆍ지돈녕부사ㆍ한성부판윤을 지내고, 1504년 의정부참찬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506년(중종 1) 우찬성이 되어 중종반정 때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옛 관직을 돌려받고 영경연사(嶺經筵事)에 임명되었다. 법조문에 밝았으며 문장에 능하여 유고로 한중계치(閑中啓齒)가 있다. 시호는 소평(昭平)이다.

 

정면(鄭勔) 1614~1687 자는 여강(汝强) 호는 여우자(如愚子) 별좌 도창(道昌)의 아들 생부는 도형(道亨). 1649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공조좌랑 예부좌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고, 1680년에 선원보(璿源譜)를 바로잡는데 공로가 커서 보사원종공신록(保社原從功臣錄)에 수록되었다. 1683년(숙종9) 통정대부 우승지로 재직 중 서인당(西人黨)이 노소로 분열하여 논쟁이 격심할 때 송시열 송준길의 논의에 찬동하였다. 얼마 후 경연참찬관에 임명되어 부제학을 겸직하던 중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해주 정씨 가문에 보첩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기록을 모으고 전국각지에 흩어져 사는 종인들에게 통문을 돌려 족보편집에 전력을 기우리다가 별세하여 그 아들인 계주(啓周)가 마침내 1694년 갑술보(甲戌譜)를 출간하였다.

 

정면석(鄭冕錫) 1850 - 1905. 자는 성익(聖翼)이고 호는 학주(鶴洲)이다. 1890년 경무대 응제로 직부전시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 수찬을 거쳐 승지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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